이글루스 | 로그인  


블로그 전문 “이글루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블로그 전문 “이글루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보금자리, 이것저것 어색한 것이 많으시죠?
포털블로그와는 다른, 이글루스만의 기능, 이글루스의 특징을 소개해드립니다.

이글루스는 블로그전문을 지향합니다.
2004년, 첫 발을 내디딘 이글루스는 국내 최초 트래백 을 도입하여 블로그전문 서비스로 입지를 다졌습니다.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 밸리’와 ‘마이’, 문화체험의 새로운 경험 ‘렛츠리뷰’, 국내 최고 메신저 네이트온 연동으로 더욱 새로운 블로깅, 독보적인 블로거가 되세요!

첫째, 공감하는 글이 있다면, 트랙백핑백을 이용하세요!
기존 포털 블로그에서 사용하던 스크랩기능 대신 트랙백과 핑백을 사용해보세요~
관심사가 비슷한 블로거를 만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둘째, 일촌, 친구, 이웃 등 오프라인 인맥 위주의 ‘친구맺기’ 기능이 필요하시면!
이글루스에서 제공하는 이글루링크를 추천해드립니다.
이글루링크를 하시면, 해당 블로거의 새글 업데이트 소식을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 카테고리별 공개/비공개 설정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이글루스는 자신이 작성한 글을 더 많은 블로거들과 나눌 수 있도록 참여와 공유를 지향합니다.
카테고리별 공개/비공개 기능은 현재 마련되어 있지 않으나 추후 필요성을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넷째, 도움이 필요할 땐, EBC 와 이글루스도움말 을 찾아주세요.
이글루스를 이용하시다 발견되는 버그나 오류, 그리오 요청사항은 운영자 공식블로그 EBC 를, 이글루스의 기능과 운영정책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글루스 도움말을 방문하세요!

※ 공지사항을 지우고 싶은 경우, 포스트의 ‘삭제’를 클릭하면 지워집니다.
※ 삭제 버튼은 한 번만 누르세요. 여러 번 클릭 시 다른 글이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null

by weisman | 2009/02/19 15:38

단양의 도담삼봉







단양의 도담삼봉

null

by weisman | 2008/12/27 07:04 | 내가 만난 산하(山河) | 트랙백 | 덧글(0)

단양 사인암



단양의 사인암


null

by weisman | 2008/12/27 07:02 | 내가 만난 산하(山河) | 트랙백 | 덧글(0)

추사체(秋史體) 성립(成立)(4)

추사체(秋史體) 성립(成立)(4)

그래서 조선서예계를 이와같이 망친 것은 근래 명필로 꼽히던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잘못된 가르침인 <원교필결(員嶠筆訣)>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퍼붓는데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에서는 그 잘못의 하나하나를 지적하여 구체적으로 논박한다. 이 논박 속에는 억지와 생트집이라고 보아야 할 부분도 상당히 많다.
(원교 이광사 : 서결)

벌써 원교 자신이 청조고증학의 성과를 어느 정도 접해 비학의 중요성을 이미 인식하고 한위 고비 임서의 중요성을 역설함으로써 비학의 선구를 이루고 있는데도 이를 거의 인정치 않으려 하거나 원교가 현완번(懸腕法)도 모르고 언필(偃筆)을 꾸짖었다고 하는 등의 사실들이 이에 해당한다. 아마 추사 자신이 조부로부터 배운 동국진체가 중국의 석학들에게 고루무법한 것으로 무참히 부정당하자 그에 대한 자괴감이 그로 하여금 원교에게 정도 이상의 분풀이를 하도록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추사로 하여금 옹, 완 이사(二師)의 서론을 한 번 듣고 깨우치게 한 바탕은 역시 <원교필결>이었고 동국진체의 철저한 수련이었다던 것을 추사는 깨달았어야 한다. 추사체가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이 후학의 눈에는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마 추사도 어느날 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어떨든 추사는 연경에 갔다온 이후부터는 주로 옹방강의 서론에 입각해 그의 서법을 익히는 것으로 서예수련을 다시 시작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가 31세 때 쓴 <이위정기(以威亭記)>를 보면 옹방강 해서 글씨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데 당정한 풍미는 그 조부 글씨의 특징을 보는 듯하여 벌써 추사다운 면목이 드러난다. 33세 때 쓴 <상촌선생비각기사(桑寸先生碑閣記事)>와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倻山海仁寺重建上樑文)>도 이와 큰 차이는 없다.
(추사 김정희 : 이위정기)

37세 때 생가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정사가 되어 둘째 아우 김명희(金命喜, 1788~1857)를 자제군관으로 대동해 가는 편에 청유(淸儒) 고순(顧?, 1765~1832)에게 써 보낸 직성유궐하, 수구만천동(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 곧은 소리는 대궐 아래 머무르고, 빼어난 구점은 하늘 동쪽에 가득하다.)은 아직 비후미(肥厚美, 살찌고 두터운 맛)가 크게 남아 옹방강의 필의가 엿보이나 이미 예기(隸氣, 에서의 기미)가 횡일(橫溢, 마구 넘처남)하여 추사체의 진면목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 때 추사는 진용광(陳用光, 1768~1835)에게도 영련(楹聯)과 시첩을 서 보내는데 이 글씨도 이와같은 필치를 보였으리라 생각된다.

다음 38세 되는 해 가을에 쓴 <허천소초발(虛川小草跋)>의 소해필체 역시 이와 같으니 벌써 추사는 30대 후반에 추사체의 골격을 이룩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실로 옹,완 이사로부터 새로운 서론을 들은지 10여 년만에 이룩한 장거(壯擧)였다.

이에 청나라 서예계는 큰 충격을 받았던 듯하니 비파서(碑派書)의 창시자로 첩학무용론을 주장해 급진비학파의 문호를 개설한 등석여의 아들 등상새(鄧尙璽,후에 전밀(傳密)로 개명(改名) 1796~1863)가 사신으로 간 추사의 부친 유당 김노경에게 그 선부(先父, 돌아간 아버지) 등석여의 행장과 필적을 내보이면서 묘지명 찬술을 부탁하고 있는 것으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비파서의 이상이 추사에게서 구현되고 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에 등상새는 그 선부의 묘지명이 추사의 부친 손에 지어지고 추사의 글씨로 써지기를 바랐었던 모양이다.
(청 등석여 : 전서)

유당(추사 선생 생부)은 결국 환로에 급급하느라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만 이때부터 맺어진 친교가 등석여의 글씨를 추사에게 보내고 등상새가 추사의 글씨를 간절히 요구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이렇게 등문과의 학연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등석여의 제자로 등상새를 양육한 이조락(李兆洛)과도 서신을 교환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어 추사는 등파의 급진적인 비학이론과 서법까지도 수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추사는 청조고증학의 난만한 발전 결과로 출현한 서예금석학 즉 비학의 제파 이론을 겸수하고 그 이론을 그의 타고난 예술적 천품으로 서예에 구현해내니 이것이 이른바 추사체다. 그러므로 추사체는 비파서학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경지를 이룩한 비파서의 결정체라 해야 할 것이다.(계속)

[출처] 추사체(秋史體) 성립(成立)(4)


null

by weisman | 2008/12/25 20:59 | 한국의 사상 | 트랙백 | 덧글(0)

추사체(秋史體) 성립(成立)(3)

추사체(秋史體) 성립(成立)(3)

한편 청에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고증학의 발전 결과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題要)>의 편찬(1773~1782)으로 전기 고증학이 일단 정리되는 건륭(1736~1795)후반기로부터 당시 연경학계의 태두로 문호가 극성하던 옹방강이 학예일치를 주장하고 비문의 서체연구를 통해 예술성을 재발견하려는 비학운동을 활발하게 진행시킨다. 그래서 종래 왕희지법첩을 비롯한 필첩 위주의 서학을 보충해야 한다는 새로운 서론을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를 실천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사실 이 당시는 왕희지시대로부터 이미 1400여년이 경과하고 있어 <지천년 견오백년(紙千年絹五百年, 종이는 천년이고 비단은 5백년)>이라는 재질의 수명한계 때문에 왕희지 진적은 물론 초당 삼대가를 비롯한 당 이전의 진적도 실존하기 어려운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첩을 조본으로 서법수련을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원형을 상실한 전모본(轉摹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기술이 발달해 있지 않던 당시의 사정으로 전사(轉寫)의 방법은 오직 영탑(影榻, 반투명의 기름먹인 종이를 원본 위에 놓고 빛을 비춰 모양을 본떠 냄)에 의존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기운이 빠지는 것은 고사하고 원형조차 변개되는 것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석은 세워지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므로 왕희지시대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진한 시대의 원적도 직접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법첩의 원형을 이 비탁(碑拓)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의 중요성을 역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비학연구를 진행해가다 보니 왕희지 절대론이란 것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왕희지체의 근원을 이루는 한예(漢隸) 즉 팔분서(八分書)의 예술성이 가장 탁월하다는 사실도 알아내게 된다. 이에 옹방강은 서예수련의 마지막 단계를 한예에 두고 그의 소급 통달을 주장한다. 이는 첩학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는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첩학을 바탕으로 비학을 포섭 겸수하려는 온건개혁론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안휘성(安徽省) 회령(懷寧) 출신의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은 선비) 등석여(鄧石如, 1743~1805)가 나와서 진전한예(秦篆漢隸)만이 서법의 준칙이라는 비학절대론을 부르짖고 첩학의 전통을 부정하려는 급진적인 행동을 보인다. 옹방강은 급진론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경계하여 조문식(曺文植, ?~1798), 유용(劉墉, 1719~1804), 육석웅(陸錫熊, ?~1792) 등 첩학파에 속하는 전배들의 비호 아래 연경에 진출해 온 등석여를 일문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 쫓아버린다.

그러나 후배학자로 옹방강 자신과도 교유가 깊었고 경학과 금석학에 정통해 장차 청조고증학계를 대표할 완원(1764~1849)이 뜻밖에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저술해 등석여의 급진개혁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이에 등석여의 비학절대설은 그 제자인 포세신(包世臣, 1775~1855)에 의해서 이론 정립을 보게 된다.

이렇게 중국 서학계가 왕희지 이후 처음 맞는 소용돌이 속으로 막 휘말려들고 있을 때 추사는 연경에 갔던 것이다. 그리고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사제지의를 맺고 돌아온다. 이때 이미 추사는 완원에게 <남북서파론>과 <북비남첩론>의 개요를 듣고 왔을 것이다. 이 저술들은 추사가 완원을 만난 4년뒤에 완원이 옹방강의 제자인 매계(梅溪) 전영(錢泳, 1759~1824)에게 내보였다 하니 그 생각들은 추사와 만나고 있을 때 벌써 정리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방강으로부터는 그의 비첩겸수론을 자세히 지도받고 왔었다. 그래서 추사는 <박혜백(朴蕙百) 계첨(癸詹)이 글씨를 묻는 것에 답함>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는데, 24세에 연경에 가서 여러 이름난 큰 선비들을 뵙고 그 서론을 들으니 발등법(撥?法)이 입문하는데 있어 제일 첫째가는 의미가 된다고 하더군. 손가락 쓰는법, 붓 쓰는 법, 먹 쓰는 법으로부터 줄을 나누고 자리를 잡는 것 및 삐침과 점획치는 법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쪽나라 사람들이 익히던 바와는 크게 달랐었네. 그리고 한위 아래 금석문자가 수천종이 되니 종요(鍾繇, 151~230), 삭정(索靖, 239~303)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비로서 나는 그 처음부터 변천되어 내려온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네>

이렇듯 추사는 옹, 완 이사(二師)의 참신한 서학이론에 크게 감명을 받고 서예금석학에 바탕을 둔 서예수련만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만만했던 자가서법의 무법고루함에 통렬한 자괴감을 느낀다.(계속)

[출처] 추사체(秋史體) 성립(成立)(3)


null

by weisman | 2008/12/25 20:58 | 한국의 사상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